이 구절은 해석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네요..
'朋'은 조개를 실에 꿴 모양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책은 대나무에 적어 그것을 연결한 죽간이었습니다.
그 책(죽간)을 함께 보는 친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.
그러니까 엄밀하게 친구(友)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문이라는 의미가 맞을 것입니다.
그러나 공자는 동문이 없었으니.. 그렇다면 이 말은 '뜻을 함께 하는 이'라는 의미가 됩니다. (이윤호 교수)
벗(동문-혹은 뜻을 같이 하는 이)이 있어(有朋)
멀리서부터(自遠) 사방에서 오니(方來) - 혹은 먼 곳(遠方)에서(自) 오니(來) -
또한(亦) 즐겁지 아니한가(不樂乎)
이렇게 보니, 오늘날에 있어서의 적용점은 다분히 정치성이 농후해 보이네요^^
(저만 그리 생각하나요?)
약간 틀어서 이리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?
오늘날의 朋을,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뜻을 함께 한 벗이 아니어도,, 가령 SNS의 예에서처럼 새롭게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그 가운데에서 '뜻'을 공유하는 新同門으로서의 벗으로 말이죠^^
실제로 저는 페이스북을 통해 새롭게 만난 분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같은 뜻을 확인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.
온라인을 통해 맺는 관계가 오죽하랴 싶었던 과거의 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지요.
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와 같이 뜻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벗을 사귈 수 있는 기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.
하지만 단지 벗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공자의 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까요 ?
'멀리서부터 사방에서 오니'
서로가 변방에 속해 있던 이들이 같은 뜻을 가졌다는 이유로 함께 모이고 뜻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(樂) 일이겠지요..
그 즐거움은 또한 발산이 위주이고 외면적이라 했습니다.
함께 '있어' 즐거울 뿐 아니라, 함께 '할 수 있어' 즐거운 벗..
우리는 우리의 벗들에게 그런 벗이 되고 있을까요?
나와 함께 하고자 손 내미는 벗들에게 기꺼이 내 손을 내어줄 수 있는..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..